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 (문단 편집) === 병오박해[anchor(병오박해)] === [[1846년]]([[헌종(조선)|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 다른 박해들에 비교하면 순교당한 사람들은 적지만,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른 박해들과 급을 같이 한다. 신유박해 때와 다르게 기해박해 이후로 풍양 조씨의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고,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제3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1808~1853)[* 현지화를 위해 쓴 조선식 성은 고(高) 씨다. 현재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은 포교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되자 김대건 신부를 육로 대신 해로로 통해 포교활동을 하도록 명했다. 여담으로 페레올의 해로 선교 시도의 이유는 단순히 조선 조정의 탄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38년 교황청의 요동대목구 분리 후,[* 1840년에는 요동대목구가 만주대목구와 몽골대목구로 다시 분리된다.] 이곳의 관할권이 [[대항해시대]] 이래로 중국 전역의 보호권(patronatus)[* 속권의 국왕이 선교사를 보호하는 권리와 의무.]을 가진 기존 포르투갈 교회 측에서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가면서 발생한 포르투갈 교회와 파리 외방전도회 간의 알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동대목구 분리 전에 만주 지방에 이미 뿌리내린 포르투갈 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프랑스 출신 파리 외방전도회 교회측 신부에 대해 비협조적이 되면서 만주 육로를 통한 조선 밀입국이 쉽지 않게 상황이 변한 것이다.([[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3775&keyword=%ED%8E%98%EB%A0%88%EC%98%AC|가톨릭대사전 '페레올' 검색어 참고]],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56661|가톨릭신문 참고]]) 포교활동을 하던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에서 붙잡히면서 그의 사제라는 직책 때문에, 조선 조정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해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 하고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더욱더 통상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에 열을 올려야겠다 판단해 김대건 신부의 처형일자를 앞당긴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김대건은 모어인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까지 6개 국어 구사가 가능했고 당시 조선에서 이런 인재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김대건의 능력을 아깝게 여겨 "배교만 하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이랑 후한 포상도 내리겠다"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부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1207025_001|헌종실록 13권 분량 참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임치백, 우술임,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이 성인품에 올랐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